충무사 - 명량대첩비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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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11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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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사
충무공 이순신의 충성심과 구국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한 사당이다. 이곳에는 명량대첩비와 노산이은상 선생이 제작한 충무공 영정을 모시고 있었으나 최근에 다시 제작됐다.
그러고 현재 명량대첩비는 원래있던 동외리(전라우수영 )로 이건됐다.
또한 충무사로 오르는 돌계단은 목포유달산에서 직접 돌을 가져다 쌓았다고 한다.
돌계단 우측에는 수군만호 비와 송덕비, 영세불망비등 30여기를 모아 이곳에 모시고 있다.
* 명량대첩비 이야기
충무사에 세워진 명량대첩비는 조선 숙종 때 충무공이 정유년(1597) 9월 16일 해남 전라우수영 앞 바다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을 기록한 것인데 비문은 숙종 때 대학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名筆)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숙종 14년 3월에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그런데 2차대전을 유발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왜란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그 비(碑)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그래서 1942년 전남 경찰부에 비를 뜯어서 서울로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인 경찰들이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고 말았다.
이 일로 인부가 죽고 목수 두 사람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불길한 일들이 발생하자 감히 실행을 못하고 경복궁 근정전 뒷뜰에 파묻어 버렸던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有志)들은 대첩비를 찾기 위한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경찰부와 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파묻혀 있는 대첩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길것이 막연했다. 이들은 미군정청(美軍政廳)에 면담을 요청하여 협조를 구해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겨 목포까지 열차로, 목포에서 다시 배를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그러나 비(碑)를 세울 장소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제각(祭閣)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으나 턱없이 부족한 기금 때문에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기도 했고 대첩비를 수백장 탁본하여 여러 시와 학교 관공서를 돌아 다니며 팔기도 했다.
드디어 1950년 비각이 완공되어 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학동으로 자리를 옮긴 명량대첩비는 최근 두 차례나 믿지 못할 영험이 나타났다. 국가의 대난이 예상될 때면 땀 흘리듯 검은 물이 흘러나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 충무공의 충절이 살아난 것이라고 한다.
1950년 6·25사변과 1980년 5·18민중항쟁 때 이 비는 두 번 우국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명량대첩비는 1965년 보물 503호로 지정, 66년에는 사당이 지어졌다. 그후 75년 성역화를 위한 조경사업을 시작해 충무공 탄신일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한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매년 4월 28일 제향(祭享)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충성심과 구국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한 사당이다. 이곳에는 명량대첩비와 노산이은상 선생이 제작한 충무공 영정을 모시고 있었으나 최근에 다시 제작됐다.
그러고 현재 명량대첩비는 원래있던 동외리(전라우수영 )로 이건됐다.
또한 충무사로 오르는 돌계단은 목포유달산에서 직접 돌을 가져다 쌓았다고 한다.
돌계단 우측에는 수군만호 비와 송덕비, 영세불망비등 30여기를 모아 이곳에 모시고 있다.
* 명량대첩비 이야기
충무사에 세워진 명량대첩비는 조선 숙종 때 충무공이 정유년(1597) 9월 16일 해남 전라우수영 앞 바다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을 기록한 것인데 비문은 숙종 때 대학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名筆)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숙종 14년 3월에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그런데 2차대전을 유발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왜란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그 비(碑)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그래서 1942년 전남 경찰부에 비를 뜯어서 서울로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인 경찰들이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고 말았다.
이 일로 인부가 죽고 목수 두 사람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불길한 일들이 발생하자 감히 실행을 못하고 경복궁 근정전 뒷뜰에 파묻어 버렸던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有志)들은 대첩비를 찾기 위한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경찰부와 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파묻혀 있는 대첩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길것이 막연했다. 이들은 미군정청(美軍政廳)에 면담을 요청하여 협조를 구해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겨 목포까지 열차로, 목포에서 다시 배를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그러나 비(碑)를 세울 장소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제각(祭閣)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으나 턱없이 부족한 기금 때문에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기도 했고 대첩비를 수백장 탁본하여 여러 시와 학교 관공서를 돌아 다니며 팔기도 했다.
드디어 1950년 비각이 완공되어 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학동으로 자리를 옮긴 명량대첩비는 최근 두 차례나 믿지 못할 영험이 나타났다. 국가의 대난이 예상될 때면 땀 흘리듯 검은 물이 흘러나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 충무공의 충절이 살아난 것이라고 한다.
1950년 6·25사변과 1980년 5·18민중항쟁 때 이 비는 두 번 우국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명량대첩비는 1965년 보물 503호로 지정, 66년에는 사당이 지어졌다. 그후 75년 성역화를 위한 조경사업을 시작해 충무공 탄신일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한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매년 4월 28일 제향(祭享)하고 있다.